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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닿는 만큼 보인다

지난달, 사내 메신저에서 글 하나를 공유받았다. 그날 하루 종일 그 글을 붙잡고 있었다. 스무 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김서준 님의 「뇌는 파일이 되고, 파리는 마인크래프트를 날아다닌다」라는 글이었다. 초파리의 뇌 지도가 공개된 다음 날, 한 개발자가 그 뇌를 마인크래프트 안에 옮겨 넣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글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뇌가 파일이 되면 복사되고, 고쳐지고, 버전이 붙는다. 몇 달 뒤, 반년 뒤, 쥐의 뇌, 그리고 사람의 뇌까지 생각을 밀고 간다.

다 읽고 나서도 한 가지가 계속 걸렸다. 같은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이 여기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까.

내가 그 영상을 먼저 봤다면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정도는 궁금했을지 모른다. 같은 장면에서 누군가는 앞으로의 십 년을 읽어낸다.

한 달이 지난 지금은 그 초파리 뇌로 리듬게임을 하고 운전까지 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책을 많이 읽어서 생기는 차이일까, 사업을 하며 붙은 근육일까. 한 달 동안 틈날 때마다 그 질문으로 돌아왔다.

현미경과 헬리콥터

개발자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경영자는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다는 말이 있다. 나는 헬리콥터 쪽을 동경해왔다. 언젠가 내 사업을 하고 싶고, 그러려면 더 멀리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하는 나를 돌아보면 늘 현미경 쪽에 가까웠다.

현미경으로 일할 때 내가 묻는 건 다음에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다. 다른 화면도 영향을 받는다면 더 살피고, 지금의 판단에 필요하지 않다면 멈춘다. 범위는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지만, 기준은 늘 지금 내려야 할 결정이다.

그 글은 다른 기준으로 움직였다. 확인할 범위가 아니라 상상할 범위를 넓혔고, 쓸모를 지나서도 계속 갔다.

다시 읽으면서 그 글이 하는 일을 나눠봤다. 먼저 이 사건이 무엇의 한 사례인지 묻는다. 인쇄술이 성경을 수도원 밖으로, 개인용 컴퓨터가 계산을 연구소 밖으로 꺼냈듯 이제 게임이 뇌를 대학 밖으로 꺼낸다고.

그다음 시간을 늘린다. 몇 달 뒤, 반년 뒤, 그다음. 시점도 옮긴다. 파리 쪽에서도 한 번 생각해보자고. 마지막으로 아직 이름이 없는 자리를 짚는다. 우리가 만든 것은 디지털 생명일까, 디지털 표본일까.

이렇게 나눠 보니 깊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해졌다. 그 글이 나보다 깊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더 멀리 갔다.

다만 “시뮬레이션 우주 가설이 증명된다”는 문장에서는 멈췄다. 정말 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문장을 확인하고 싶었고, 글은 이미 다음 가능성으로 넘어가 있었다.

현미경은 깊이 들어가고, 헬리콥터는 멀리 간다. 서로 다른 도구였다.

그래도 질문은 남았다. 왜 어떤 사람은 그 장면에서 멀리 가고, 나는 멈출까.

손이 모자라던 몇 주

최근 몇 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사람이 하나하나 붙잡고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 쌓였고, 아무리 손을 보태도 다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계속 그렇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어서, 남는 맥 한 대에 LLM을 얹은 작은 봇을 만들었다.

LLM은 같은 일을 맡겨도 매번 조금씩 다른 답을 한다. 정해진 일을 정해진 대로 하게 하려면 규칙을 쌓고, 빗나가는 답을 하나씩 고쳐야 한다. 그렇게 깎고 깎은 봇이 혼자 일을 끝낸 날, 묘한 쾌감이 있었다. 사람 손으로는 다 따라잡지 못하던 일에 처음으로 손이 닿았다.

넘기지 않은 불편

요즘 여러 회사를 알아볼 일이 있었다. 회사 하나를 알아보는 데 탭이 열 개씩 열렸다. 채용 사이트 세 곳을 오가며 정보를 맞춰보고, 투자 라운드는 투자 정보 사이트에서, 논란이 없는지는 기사에서 찾았다. 퇴사자가 갑자기 늘지는 않았는지도 따로 확인했다.

이런 불편은 보통 그냥 견딘다. 원래 그런 거니까. 예전의 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이번에는 넘기지 않았다. 회사를 알아보는 서비스를 작게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찾아본 서비스들은 이력서를 넣으면 변환해주거나, 컨텍스트를 넣어둔 챗봇 몇 개 정도였다. 내가 궁금한 건 정보 목록이 아니라 이 회사가 나와 맞는지였다. 그러려면 회사에 대한 지식부터 제대로 쌓아야 했다. 안드레 카파시가 말한 LLM Wiki처럼 지식을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관계를 엮어보고 싶었다.

왜 이번에는 넘기지 않았을까. 돌아보면 답은 단순했다. 몇 주 전에 봇을 만들어봤기 때문이다. 맥 한 대와 LLM으로 무엇을 자동화할 수 있는지 감이 있었다. 그래서 이 불편이 견뎌야 하는 일이 아니라 풀 수 있는 문제로 보였다.

손이 닿는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조금 바꿔 말하고 싶어졌다. 손이 닿는 만큼 보인다.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 환경을 자기가 할 수 있는 행동의 모습으로 본다. 의자를 보면 앉을 수 있는 것이 먼저 보이는 것처럼. 전에는 탭을 오가는 수고만 보였다. 봇을 만들어본 뒤에는 그중 어떤 일을 기계에 맡길 수 있을지가 보였다.

그렇다면 헬리콥터 뷰는 높이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경영자가 멀리 보는 건 높은 곳에 있어서라기보다 손을 쓸 수 있는 범위가 넓어서일 수 있다. 그 결정은 시장과 사람과 돈의 방향까지 닿는다. 개발자가 코드 한 줄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곳이 손이 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초파리 영상에서 십 년을 본 글쓴이는 그 영상 앞에 무엇을 들고 서 있었을까. 어려운 것이 쉬운 자리로 내려오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무엇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같은 질문을 오래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사이트는 장면에서 뽑아내는 게 아니라 들고 있던 것과 장면이 부딪혀서 생기는 것 같다.

내가 들고 있던 건 그 봇이었다. 가장 정신없던 몇 주가 새 렌즈를 쥐여준 셈이다.

같은 질문, 다른 컨텍스트

그렇다고 봇을 만들어본 경험만으로 처음의 질문이 다 풀리지는 않았다. 불편을 고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것과 초파리 영상에서 십 년 뒤를 상상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AI와 일하다 보면 같은 질문에도 매번 조금씩 다른 답이 돌아온다. 처음엔 그저 랜덤이라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랜덤이라, 블랙박스 테스트처럼 넣어보고 나온 걸 확인할 수밖에 없을 때도 많다. 그래도 아무 답이나 나오는 건 아니었다. 앞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따라 같은 질문도 전혀 다른 곳에 닿았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같은 장면을 다르게 보는 건 각자 다른 컨텍스트를 들고 있어서다. 독서와 사업 경험은 그 컨텍스트를 만든다.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차이도 있다. 가장 그럴듯한 답이 나왔을 때 멈추느냐, 계속 생성하느냐. 개발자로 일하며 나는 정확한 답 하나로 빠르게 수렴하도록, 말하자면 온도를 낮추는 훈련을 받아왔다.

재밌는 건 내가 LLM을 두 가지 방식으로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봇을 만들 때는 흔들림을 깎아내서 매번 같은 일을 하게 만든다. 무언가를 구상할 때는 첫 답이 그럴듯해도 질문을 더 이어간다.

내 온도가 가장 높을 때는 글을 쓸 때, 그리고 글로 쓸 만한 무언가를 만났을 때다. 아침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할 때도 가끔 그렇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다. 그걸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현미경을 내려놓지 않고

처음에는 현미경을 내려놓고 헬리콥터에 올라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AI가 현미경의 일을 가져갈수록 다들 헬리콥터로 올라가려 한다. 나도 그 흐름 안에 있다. 앞으로도 읽지 않은 코드를 머지할 것이다. 그래도 필요할 때는 다시 내려와 직접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떠올리는 건 이미 자리를 잡은 경영자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창업자에 가깝다. 그리고 YC가 창업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생각보다 현미경 쪽이다. 사용자와 직접 이야기하라고, 확장되지 않는 일을 하라고 말한다. 폴 그레이엄은 좋은 창업 아이디어는 떠올리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겪는 문제 안에서.

어쩌면 창업자는 헬리콥터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고도를 가장 자주 바꾸는 사람일 것이다. 아침에는 사용자 한 명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오후에는 시장을 내려다본다.

경계할 것도 있다. 봇을 한 번 만들어봤다고 모든 불편을 자동화할 문제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묻게 된다. 그래서 현미경을 내려놓을 수 없다. 내려가서 정말 고칠 문제인지 확인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여전히 맞다. 다만 지금의 나에게는 이렇게 들린다.

손이 닿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손을 뻗게 된다.


이어지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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